탈시트콤화를 외친 마지막 절규, 지붕뚫고 하이킥 잡상

‘지붕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으로 지칭)이 끝났다. 9개월간의 대장정. ‘김병욱 시트콤’이 보여줄 수 있는 현실적이지만 맛깔나는 캐릭터, 코믹한 에피소드들을 뛰어난 서사로 풀어내며 인기 가도를 달린 이 프로그램은 그간의 유쾌함을 밥상 엎듯 엎어버리고 파국의 종결을 맞이했다. 그간 김병욱의 시트콤이 늘 그러했듯이.

드라마의 종결이 되자마자 MBC홈페이지의 시청자 게시판이 다운되고, 관련 홈페이지들은 모두 난리가 났다. 대부분 무책임한 결말을 성토하는 것으로, 극의 흐름을 깨는 비상식적인 마지막이다, 비극에 집착한 겉멋이다라며 PD와 라이터를 일제히 비난하는 모습이다. 더욱이 이러한 이야기는 그간의 인기를 반증하듯, 웹상에서는 관련 게시판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발생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웹상의 예의, 격식을 가식으로 치부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이 모인 DCinside의 코미디프로그램 갤러리, 그곳에서 나온 비난은 그런 시청자들의 원망을 좀 더 원색적인 모습으로서 드러낸다. ‘지붕킥 결말 애미없네.’

여타 일일드라마들을 능가하는 서사를 보여준 이 시트콤의 PD가, 라이터가 이러한 비난을 받을 것임을 짐작하지 못할 리 없을 것이다. 이미 알려졌듯 김병욱PD와 작가들은 지붕킥 뿐만아니라 전작인 ‘거침없이 하이킥’, ‘왠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크크섬의 비밀’등에서 이미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 바가 있다. 시청자들의 바람을 모르는 바가 아닐텐데도 굳이 이번에도 그러한 결말을 연출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자면, 반전에 대한 허영 때문에? 시청들을 농락하려는 욕심에?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어진) 후속작을 요구하는 시청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아니다. 아닐 것이다. 10여년이 넘게 제작하는 시트콤마다 히트를 기록한 김병욱과 작가진이 그러한 것들을 위해 결말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간 그들이 만들어온 시트콤의 일관된 비극적 결말은, 그러한 담론들을 넘어 일종의 작품철학이라는 것을 형성하여 그것을 시청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지붕킥’의 결말은 그러한 생각들에 관한 완전한 마침표다. 내가 생각하는 ‘지붕킥’의 마지막이란 ‘지붕킥’만의 마지막이 아닌 그들이 만들어 내온 시트콤 전반에 관한 최종적인 결론인 것이다.

먼저 우리가 이 결말을 납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지붕킥의 안이 아닌 바깥, 즉 ‘시트콤’ 자체에 대한 정의이다. 그리고 그 앞에 필요해지는 것은, ‘시트콤’을 가능하게 하는 이야기, 즉 픽션 그 자체를 논할 필요가 있다. 시트콤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픽션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런 것에 관한 이야기 없이 지붕킥의 마지막을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픽션의 3요소에 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어떠한 내용이든, 비극이든 희극이든간에, ‘내용’으로서의 3요소라는 것은 소설의 3요소와 같다. 주입식 암기교육에 길들여진 이라면 곧 ‘인물, 사건, 배경’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다른 말로 하자면 캐릭터와 갈등과 세계관이다. 이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허구의 이야기, 즉 픽션은 존재할 수가 없다. 배경속에서 캐릭터가 움직이며 사건과 마주치는 것이 곧 픽션인 것이다. 그것은 장르와 매체의 구분이 없다. 영화, 연극, 만화, 소설, 동화, 어느 것도 마찬가지다. 라이트 노벨이건 판타지건 일일드라마건 시트콤이건 가릴 것이 없다. 더 이상 짤라 쪼갤 수 없는 픽션의 원자들인 것이다. 이 원자들을 어떻게 움직이고 결합시키느냐에 따라 같은 원자들로도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변주되어 나온다. 이것이 극을 구성하고 전개시키는 방법, 즉 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사에 관한 사전적 정의는 물론 이것이 아니다. 달리 더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니 양해를 부탁드리며 더 적합한 단어가 있다면 알려주십사 한다. 이하 본 글에서 말하는 ‘서사’라는 단어는 사전적 정의 보다는 상기한 정의를 기준으로 하도록 하겠다.)

이 허구의 원자들을 구성하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배경을 비현실적으로 그릴 수도 있고 혹은 극사실적으로 그릴 수도 있다. 사건, 즉 갈등에 있어서도 개인의 내면에서부터 등장인물 전체를 아우르기까지 선택할 수 있다. 인물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구성 방법들은 일종의 규칙에 따라 나눠 볼 수도 있는데 바꿔 말하자면 이것이 곧 장르가 된다. 장르는 구성법에 따라, 다시말해 서사의 형식에 따라 갈리며 이것은 작품의 결말이 슬픈 것이냐 허무한 것이냐 같은 것들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트콤을 구성하는 서사적 형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 정확한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바로 인물의 부각이다. 현대극에서 캐릭터가 중요하지 않은 극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트콤이란 것이 다른 장르와 구분되게 하는 것은 역시 캐릭터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입체적이지만 또 정형화된 형태로 구축된 캐릭터들, 이 캐릭터들이 배경속에서 움직이고 또 다른 캐릭터들과 부딪히며 다양한 사건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하루하루 지나가는 일상속에서 1회성으로 다루어 질 뿐이며, 곧 다음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에 뒤덮인다. 사건은 극을 관통하지 못하고 그저 흘러가며, 다음 사건에 의해 그저 지난 에피소드로 정리된다. 캐릭터들을 다시 축조하며 살을 덧입히는 장치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 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이미 지난 일’이란 것, 이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생겨도 이미 지난 일, 이것은 우리의 일상과도 닮아 있다. 시트콤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이미 지난 일’이 되듯, 우리의 삶도 ‘어떤 잊을 수 없는 희노애락의 순간’이 있더라도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묻혀 ‘이미 지난 일’이 되고 일상을 맞는 운명에 처하는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은 이 캐릭터들을, 그들이 쌓아가는 일상을 끝없이 소비함으로서 만족을 얻는다. 자신과 시트콤의 공통점, 이어지는 캐릭터들의 일상들을 소비함에 있어 극을 타고 흐르는 거대한 흐름이라는 것은 방해가 된다. 아니, 이 흐름은 신경쓸 이유가 없어진다. 그것은 극의 양념으로서 변환되고 또 일상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진다. 시청자들은 이런 흐름을 흐름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하지만 그 어떤 인물과 사건과 배경들이 어떠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은 서사되는 순간 허구의 것이 된다. 어떤 실재적 존재의 모습을 그대로 본따 만들어진 리얼한 오브젝트라 해도, 글로써 그림으로써 영상으로써 그것이 표현되면, 결국 그것은 실재에 관한 묘사된 상태의 허구다.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시뮬라크르들이 뛰노는 시트콤은 하나의 거대한 시뮬레이션이다. 실재의 시뮬레이션, 허구의 시뮬레이션. 그 어떤 것이든 실존과는 거리가 멀다. 이 시뮬라크르들은 TV밖을 벗어나면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허구적인 것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존재한다. 머릿속에서. 누구의? PD나 작가의 머릿속? 아니다. 시청자의 머릿속이다. 시트콤이란 형태의 시뮬레이션은 소비됨으로서 그 허구로서의 탈을 벗고 ‘소비 그 자체로서’ 그것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이 시뮬라크르들은 끝없이 소비되는 한 존재는 상실되지 않고 끝없이 약동한다. 허구가 허구가 아니라 실재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서사에 관한 문제로 돌아가보자. 김병욱PD는 매스컴과의 여러차례 인터뷰를 통해 지붕킥을 시트콤으로 이해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또한 ‘거침없이 하이킥’에 대해서도 인터뷰를 통해 지붕킥과 같은 의도의 연장이라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부터 사용된 극의 흐름과 관련이 있어보인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민정과 민용, 신지의 관계를 극 전체에 걸쳐 풀어냄으로서 탈시트콤화를 시도한 바가 있다. 이것은 물론 시청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시청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시도는 양념처럼 여겨지거나, 혹은 또 하나의 일상으로서 받아 들여질 뿐이었다. 그저 소비되는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일상, 혹은 환상의 하나로 소비할 뿐. 애초에 그런것에는 관심조차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붕킥에서는 애초에 시트콤의 캐릭터를 잡는 초반부터 시트콤의 방법론을 버린다. 짦은 컷, 코믹한 표현, 변함없이 위트가 넘치는 영상에 시청자는 즐거워 하지만 분명 시트콤의 표현양식은 아니다. 초기의 이순재집에 자리잡기까지의 신세경을 중심으로 서사되는 이야기는 시트콤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반적인 극의 흐름에 가깝다. 이런 흐름을 깨버린 것은 세경이 순재집의 식모로서 자리잡아 무대가 고정된 뒤로, 그제서야 비로소 지붕킥은 시트콤으로서 흘러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 뒤에도 탈시트콤화한 서사는 이어진다. 대표적인 것은 세경, 지훈, 준혁, 정음의 네 남녀를 가운데 놓고 펼치는 연애담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시계추가 넘어가 버린 뒤다. 이미 캐릭터들이 자아내는 일상에 녹아난 시청자들은 그 의도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넘긴다.

그 외에도 세경을 중심에 놓는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시트콤이 아닌 형태로 서사된다. 김병욱PD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듯, 지붕킥은 세경을 주인공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분량은 시트콤으로서의 분량이 압도적이지만 그것도 ‘거침없이 하이킥’시절에 비하면 크게 조절이 된 상태다. 하지만 상관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있어서든 ‘사건’보다는 ‘일상’이 더욱 많은 법이니까.(이런 점을 염두에 둔 구성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극의 종반을 말해보자. 아마 못본 이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기사를 통해 여러차례 오르내린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인용하겠다. 세경은 병원에서 지훈을 만나 차로 공항을 향한다. 한편 혜리는 신애를 원망하며 집에서 울부짖고, TV에서는 충돌사고로 인해 4명 사망 8명 부상이 있음을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장면은 다시 바뀌어 3년 뒤, 성장한 정음과 준혁의 모습이 나오고 정음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비탄에 잠긴다. 1초만 달랐어도. 여기까지는 김병욱표 다른 시트콤과 다를 바 없는 결말이다. 이러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끝에 담겨 있다. ‘지붕킥’ 제작진의, 혹은 김병욱 본인의 작가적 결말의 집약이 마지막 씬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간 김병욱의 시트콤은 결말에서 픽션의 종결을 선언하곤 했다. ‘왠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파국을 가슴에 안은 캐릭터들의 여행, 거침없이 하이킥의 순재의 치매와 신지 민경 민용의 파국. 캐릭터들의 종말을 그림으로서 픽션의 문을 닫아 내리려했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시도 였다. 어떤 결말이든 결국 캐릭터의 미래는 열려 있을 수 밖에 없고, 시청자들에게 소비됨으로 허구들은 사라지지않고 생명을 얻는다. 실재로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결국 민정과 윤호의 라스트 씬이 나온다. 즉 결말에서 조차 미래를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트콤은 종결되었지만 캐릭터는 숨 쉬고 살아 움직여 미래를 갖게된다.

다시 마지막 씬을 보자. 비가 오는 찻길, 신세경의 고백과 지훈의 눈물, 그리고 사고를 암시하는듯 지훈은 정면에서 시선을 돌려 세경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리고 서두른 종결. 흑색배경의 BGM 조차 없는 로고. 끝. ‘순간의 영원’을 말한 세경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정지된 화면. 사고를 암시하는 장치들은 도처에 있지만 극중 사고의 실존은 어디에도 없다. 죽음 자체는 그리지 않고 빠져나가는 흑색의 배경과 로고, 극중 어느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한 바 없건만 시청자들은 모두 그들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소비됨으로서 생명을 얻는 캐릭터의 시청자에 의한 죽음. 이는 곧 소비됨으로서 존재를 얻은 시뮬라크르의 죽음이다. 시뮬라크르들의 약동은 정지하고 이로서 시트콤의 서사 또한 정지 되고 파괴된다. 짧은 순간 극단에 이른 이 결말은 결국 ‘신세경 이야기’로서의 지붕킥의 대미를 장식함과 동시에, 시트콤의 파괴를 뜻한다. 화면의 정지. 극의 정지. 자신의 손으로 쌓아올린 ‘시트콤’으로서의 지붕킥을 시청자들이 부숴내리는 것이다. 이보다 더 통쾌한 반전이 있으랴? 이로써 시트콤으로서의 지붕킥은 사라지고, ‘죽음에 이른’ 세경의 이야기만이 남게 된다. 결국 이로써 김병욱은 오랜 세월 자신을 붙잡아왔던 ‘시트콤’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았다.

조금 더 오버센스를 발휘하자면 ‘이대로 시간이 정지 하면 좋겠다.’는 세경의 마지막 대사 또한 공항을 향하는 차 안, 이야기의 끝을 향해 달리는 마지막 씬의 시뮬라크르로서의 말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지훈의 눈물 또한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거기까지는 그저 짐작의 영역으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해석을 허용한다면, 김병욱은 진심으로 시청자들을 능멸한 셈이 되니까 말이다.

물론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이러한 해석들은 일개 시청자가 제시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의 하나, 그 이상은 되지 못한다. 제작자 본인의 입에서 직접 듣지 않는 한 이러한 것은 영원히 그런 생각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겠지.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들은 ‘이런 생각도 있구나’하는 정도로만 받아주셨으면 한다.

이후의 김병욱의 행보는 어찌될지 모르겠다. 순풍산부인과로 시작된, 자신의 시트콤에 대한 결론. 또는 마무리. 시작부터 시트콤을 떠난 그의 결심이 어떻게 될지는 실은 본인도 잘 모르고 있겠지만, 이런 화끈한 마무리 뒤라면, 더 이상 시트콤 제작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송이란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결심을 깨고 ‘지붕뚫고 하이킥’이 만들어졌듯이, 여전히 ‘김병욱표 시트콤’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결국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 방송가의 숙명이 아닐까. 새로운 시도, 새로운 문법, 새로운 결말을 가지고올 김병욱의 극은 그 ‘형태’가 어떤지를 접어두더라도 기대해도 좋으리라. 그것이 새로운 소비에 목마른 시청자들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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